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빌헬름 1세 (문단 편집) === 즉위 후 === 즉위 전인 섭정 시절부터 평소의 지론대로 군대를 강화하려고 했고, 1859년에 폰 론을 장관으로 임명하여 국방 개혁안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예비역 지휘를 현역 장교에게 맡기는 개혁안과 징병제 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늘리는 예산 문제로 [[하원]]과 충돌하자[* 사실 징병 기간도 문제지만 [[예비군]] 지휘를 현역 장교에게 맡기는 문제가 더 컸다. 예비군들에게 반동 정치 성향을 강요할 우려가 있다하여서... 군 병력 증강은 오래부터 제기된 문제로 인구가 1815년보다 많이 늘어서 편제를 늘려야 된다는 데는 부르주아들도 공감은 하고 있었다.] 퇴위를 불사하며 평소 눈여겨 본 [[오토 폰 비스마르크|비스마르크]]를 총리로 전격 기용하였다. 당시 프로이센의 정치 체제를 보면 "의회는 그저 세금을 내는 부르주아들의 푸념이나 들어주는 역할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왕권이 하원과 충돌하니 '''"아랫것들에게 굴복하느니 차라리 왕 못 해먹겠다."'''라고 [[몽니]]를 부린 것. 이렇게 임명된 비스마르크는 유명한 철과 피 연설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의회의 예산권을 대놓고 침해하고 군대 예산을 늘렸는데, 이것이 가능한 건 역시나 총리는 오로지 국왕에게만 책임을 지지 의회 따위와 수직관계가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외 군주제 전통에 길들여진 의회에서 더이상 강한 충돌을 원치 않아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의 이런 독단성은 이후 반대파와 대중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를 떨어뜨리는데 한몫 한다.] 어쨌건 국내외의 반발을 무시하며 강력한 육군을 만들었다. 다만 대외 정책에선 빌헬름 1세와 다른 구상을 하는데 1862년 덴마크 위기 때는 독일 연방 의회에서 민족주의를 자극해서 덴마크를 털었는데, 이는 '''민족주의란 아랫 것들의 상스러운 불순사상'''이라 생각하는 빌헬름 1세의 지론과[* 빌헬름 1세가 특이한게 아니라 이 시기 대부분의 군주들은 민족주의자들과 상극이었다. 그나마 호의적이었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도 통일을 위해 프랑스에 사보이아와 니차를 할양한 것 때문에 민족주의자들과 갈등이 있었다.] 다른 것이었다. 빌헬름은 18세기 태생으로 [[나폴레옹 전쟁]]을 겪으며 성장한 데다가, 평생 군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아랫것들이 입헌이고 자유고 민족주의고 뭐고 걍 정치 사상 자체를 가지는 것을 금기시했다. '왕권은 어디까지나 [[야훼|하느님]]이 통치자에 수여한 것이요([[왕권신수설]]) 왕은 하느님에게 수여받은 왕권으로 통치하고 신민은 복종해야 한다' 같은 게 그의 지론이었다. 1866년 오스트리아와 독일 내 주도권을 놓고 갈등이 빚어지자, 프로이센 왕은 어디까지나 오스트리아 황제의 선봉장 역할이나 해야 된다는 지론[* 지금은 [[독일/역사|독일사]]에서 [[호엔촐레른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이 라이벌로 보이지 모를지만 호엔촐레른 가문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초대 [[독일왕]] [[루돌프 1세]]의 선출 때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의 충실한 앞잡이 역할을 자처했다. [[종교 개혁]] 시기에도 [[카를 5세]]의 눈치를 보느라 [[요아힘 2세 헥토어]]는 개인적으로 [[루터교회]]로 개종했음에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전체에 종교 개혁을 시행하기를 주저하다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루터교회가 정식으로 공인되고 나서 종교 개혁을 시행했을 정도였다.]덕에 비스마르크가 너무 막 나가는 걸 자제시켰으나, 역시 또 현실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을 격파하고나자 생각이 바뀌었는지 [[빈(오스트리아)|빈]]까지를 공격하고, 최소 [[보헤미아 왕국]]을 포함한 영토 할양을 꼭 받아내야 하며 또한 이겼으니 승자의 권리로서 빈에서 개선 행진을 벌여야 한다는 생각이었지만 비스마르크가 밥통 싸들고 반대하자 뜻을 꺾는다. 그 결과 [[북독일 연방]]을 조직하였으며, 이 정도로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nton_von_Werner_-_Kaiserproklamation_in_Versailles_1871.jpg|width=100%]] || 1868년부터 프랑스와의 갈등이 심각해져서 역시 전쟁엔 소극적이었으나 이내 마음을 다잡았고[* 빌헬름 1세는 전쟁에 나가기 전에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어머니]]의 석관 옆에 무릎을 꿇으며 결의를 다졌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대승을 거뒀다. 결국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즉위식을 올렸다. 빌헬름 1세는 황제 자리나 [[독일 통일]] 따위는 아무 흥미가 없었고, 오로지 프로이센과 군대만이 그의 관심사에 있었다.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도 독일 내 복수 주도권 정도면 충분하다고 만족했지 오스트리아를 아예 배제하려는 것은 그의 구상과 거리가 멀었다. 오랜 숙적이던 프랑스를 꺾은 건 그도 원하던 바였으나, '''[[황제]] 자리는 전혀 원하지 않았다.''' 비스마르크의 설득이 잘 먹히지도 않아서 비스마르크가 뒷공작으로 독일 제후 중 빌헬름 1세의 사위 [[바덴 대공국|바덴 대공]] [[프리드리히 1세(바덴)|프리드리히]][* [[1848년 혁명]] 당시 대공이었던 아버지 레오폴트가 프로이센에 도움을 요청해 빌헬름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6개월 동안 바덴에 주둔한 적이 있는데, 이때 빌헬름과 인연을 트게 되었다. 그 후 1856년 빌헬름의 딸인 [[루이제 마리 엘리자베트|루이제 공주]]와 결혼했다.]가 직접 빌헬름에게 황제 자리에 올라달라고 요청한 데다가 20여개 연방 군주들이 직접 와 있었기 때문에, 내키지 않았지만 황제 추대에 화답한 것. 사실 황제 자리도 '독일의 황제(Kaiser von Deutschland)'[* Deutschland는 독일민족의 땅(또는 국가), 즉 당시 [[북독일 연방]]에 속한 많은 국가들을 모두 포괄한 개념이다.]라면 받아들이겠다고 했지만, 그런 식이면 구성 제후국들의 군주들이 얄짤없이 신하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수용하지 않을 거라는 비스마르크의 설득 때문에 독일 황제(Deutscher Kaiser)가 수여된 것.[* 독일 황제 자리는 프로이센 국왕이 세습하지만, 프로이센과 다른 제국 구성 국가들의 법률적 위치는 제국 내에서 동일했다. 황제, 황후, 황태자, 황태자비는 있지만 나머지 프로이센 왕실 구성원은 프로이센 왕자/공주(Prinz(essin) von Preußen)이라는 작위를 받았지 독일 왕자/공주(Prinz(essin) von Deutsches)는 아니었다.] 한국어로는 ①Kaiser der Deutschen, ②Kaiser von Deutschland, ③Deutscher Kaiser 모두 '독일 황제'로 번역되지만 번역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차이가 있다. 당시 자유주의 입헌 주의자들은 사회계약론에 바탕한 국민 주권을 기반으로 군주제라도 아래에서 추대된 권력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의미는 군주제 주의자들에게 "권력이 아래에서 나왔다면, 아랫것들이 나가라고 하면 나가라고 해야 되는거냐?"는 굉장히 불순한 사상으로 여겨졌다. 나폴레옹(Empereur des Français)과 루이필리프 (roi des Français)의 칭호가 그 부류인데 프랑스인의 황제/왕 이란것은 왕권신수설을 부정하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②의 칭호는 기존 봉건제 하의 왕국이나 제국은 신이 통치권을 수여했다는 종교적인 정통성 까지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 제후나 인민 따위에게 묻지 않고 신성 불가침한 통치 권력이 수여 받았다는 의미라서 역시 독일 군주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굳이 번역을 하자면 ①은 '''독일'인'의''' 황제, ②는 '''독일의''' 황제, 그리고 ③은 그냥(?) 독일''' 황제'''를 의미하는데, ①의 경우는 왕권신수설을 부정하는 감희 까마득한 아랫것들에게 수여 받았다는 전제가 있어서 군주제주의자들에겐 입헌세력의 불순한 발상이라 받아들일수 없었다. 전 유럽 왕실에게 왕따 당한 루이 필리프의 시민의 왕과 같은 천박한 칭호 였다. 심지어 [[1848년 혁명]] 당시 독일 혁명을 주도한 혁명파에서 빌헬름 1세의 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바쳤다가 거절당한 제위도 ①이었으니 당연히 형보다 더 보수 군주제 주의자이니 빌헬름 1세에겐 무엄한 칭호일 뿐이었다. ②는 독일 군주들이 프로이센과 명목상 동등한 제후국왕들이 빌헬름의 신하가 되는 것이라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그래서 대안이라고 추대된 ③의 칭호는 그냥 (독일) 황제인데 독일 군주 중에 대표격으로 추대 되었다는 정도의 별 다른 의미 없는 칭호 였다. 그래서 빌헬름 1세는 취임식 아침까지 비스마르크에게 "독일 황제"(Deutscher Kaiser) 자리는 타국 군주가 오면 의전상 각국 왕실 근위 연대 소속으로 수여하는 '명예 대령'직에 불과하며 자신의 관심사는 프로이센 왕국, 프로이센 군대 뿐이며 칭제 선언으로 프로이센이 없어지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매우 아쉬워했다고 한다. [[파일:독일 황제관을 쓴 빌헬름 1세.jpg]] 독일 황제관을 쓴 빌헬름 1세. [[파일: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jpg|height=500]] 빌헬름 1세와 [[오토 폰 비스마르크]].(오른쪽)[* 참고로 비스마르크의 키는 193cm로 엄청난 거구였다. 빌헬름 1세 역시 키 180cm로 장신에 속한다. 단지 비스마르크가 너무 커서 작아 보일 뿐이다.] 이처럼 비스마르크와 항상 뜻이 일치한 것은 아니며 갈등도 있었지만, 빌헬름 1세는 자신보다 그가 나라에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하에게 맡기는 인내심을 보여줘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몇몇 경우는 빌헬름 1세의 의견이 더 옳았던 것으로 훗날 판명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사이가 안 좋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동유럽 외교 정책에서 두 사람은 크게 대립하였는데, 이 외교 정책은 '''"비스마르크이기에 할 수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이는 곧 '''"비스마르크가 없으면 유지될 수 없다."'''는 소리. 하지만 '''"비스마르크가 없으면 유지될 수 없다."'''는 비판은 곧 '''비스마르크에 대한 극도의 상찬'''이기도 하다.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끼인 양면전선 독일의 전략적 상황은 비스마르크 뿐만 아니라 그냥 독일 자체의 지정학적 문제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문제다. 이 사이에서 줄타기를 성공적으로 해낸 정치인이 비스마르크 말고 누가 있는지 떠올려보면 딱히 떠오르지가 않는다. 유럽은 좀 잘나간다 싶으면 단체로 몰매맞는 대륙이다. 히틀러는 말할 것도 없고, 그 [[프리드리히 대왕]]마저도 힘 좀 쓰려고하다가 양쪽에서 공격받고 주저앉았던 것을 보면, 독일에서 명멸했던 수많은 정치/군사 정치인들 가운데 오스트리아를 패서 주도권을 뺏고, 프랑스를 쳐서 파리에서 행진을 하고, 독일 통일까지 이루는걸 단 한세대만에 이루었음에도 적절히 주변국의 어그로를 관리하면서 최대한의 이익을 보장받는 선에서 확장을 멈추면서 독일의 외교적 정세를 파국에 이르게하지 않는다는건 비스마르크가 해내기 이전까지는 상상하기도 힘든 업적이었고, 동시에 그 이후로도 누구도 이루지 못했다. 다시말해 '''비스마르크가 없었다면 처음부터 안 될 일'''을 '''"비스마르크의 초월적인 대전략적 혜안과 외교적 감각덕에 살아있을 때 동안만 유지했다."'''라는 말과 같다는 뜻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지금은 상상하지 힘들지만 본래 독일과 러시아는 '''굉장한 우호 관계'''였었다. 프로이센을 구원해준 독빠 황제로 유명한 [[표트르 3세]]부터 시작해 나폴레옹 전쟁에서도 둘은 연합군이었으며 황실끼리도 관계가 굉장히 깊었다.[* 빌헬름 1세의 여동생인 [[프로이센의 샤를로테|샤를로테]]가 [[니콜라이 1세]]의 [[황후]]이다.] 당장 러시아 역사상 손꼽히는 군주인 [[예카테리나 2세]]도 [[안할트]] 아스카니아 가문[* 아스카니아 가문은 프로이센 왕국의 근본인 [[브란덴부르크]]를 개척한 가문이다. 브란덴부르크가 [[선제후]]로 공인되기 전 브란덴부르크 가계의 대가 끊겼고, 작센에서도 선제후로 공인받은지 3대 5명만에 대가 끊겨서 [[작센 선제후국|작센 선제후]]도 [[지기스문트]]가 [[베틴 가문]]에게 넘겨주는 바람에 안할트 하나만 남았다.]출신으로 프로이센 왕국의 [[슈체친|슈테틴]] 태생인데다가 프로이센에서 시집온 여인이었다. 그러던 와중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을 격파하고 발칸반도로 세력을 넓히게 되는데 이에 오스트리아와 영국이 반발하여 갈등을 빚게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스마르크가 스스로 중재자를 자처하며 [[베를린 회의]]가 열렸다. 이 베를린 회의에서 러시아는 당연히 독일이 러시아편을 들어줄 것이라 잔뜩 기대를 했으나 기대와 달리 독일은 앞서 언급한대로 중재자라는 애매한 위치를 고수했고 이는 러시아에게 있어서 곧 배신이라 여겨졌다. 러시아 황실은 엄청나게 분노해 독일을 격렬하게 비난하는 편지까지 보내며 지금까지의 우호적인 대독일 외교관계를 상당부분 수정하여 재정립 하는 수순까지 이르렀으며 비스마르크는 이에 대비해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추진하게 된다. 그래도 비스마르크가 직접 활동하던 시기에는 분노한 러시아를 살살 달래가며 최소한 적대관계로 돌아서는 것을 막을 수 있었지만 이미 위에서 언급 되었듯 이는 시스템이 아니라 비스마르크 개인의 능력에 의존한 것이었고 비스마르크 사후에 작동할 시스템이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본인이 사라져도 후대까지 잘 작동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바로 재상으로서의 임무인 만큼 이 점에서 비스마르크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결국 이후 손자 [[빌헬름 2세]]가 즉위하고 비스마르크를 내쳤는데, 이때부터 독일과 러시아는 오랜 우호관계가 파탄나고 본격적인 적대관계로 돌변하여 마침내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와는 달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오스트리아를 제 앞가림도 못하는 과대 평가된 나라]][* 19세기 후반 이후 민족주의 광풍이 불면서 오스트리아는 이미 여러반 해체위기를 겪었다.]라고 지적하며 과연 러시아 대신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는게 옳은 선택인가 의문을 표시했고 이 점에서는 빌헬름 1세가 옳았음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입증되었다. 참고로 빌헬름 1세는 공적 관계에서 신뢰한 것과는 별도로 개인적으로는 비스마르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비스마르크 같은 재상 아래에서 황제 노릇 하기 참 힘들다.(Es ist nicht leicht, unter einem solchen Kanzler Kaiser zu sein)"'''라는 그의 명언(?)은 지금도 회자될 정도다.[* 실제로도 비스마르크는 워낙 독단적인 성향이 강해서 빌헬름 1세를 피곤하게 만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